한국교회의 검은 역사가 말하는 것


지난 글에서 ‘열린지식나눔 : 평범한 상상’이 열린다고 소개한 바 있다. 드디어 그 첫 번째 시간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의 막이 올랐다. 한 때 15kg 감량 경험자로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냥 토끼 같은 아내의 남편이자 여우같은 아기의 아버지인 강사님을 모셨다. 10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망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중박’정도는 된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찬란한 한국교회의, 흰 역사도 아닌 검은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것일까?


고리타분한 질문을 던져보자. 역사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역사 교과서에서 한번쯤 봤을법한 카(Edward Hallet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한편 ‘유희하는 인간’이란 개념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역사란 하나의 문화가 자신들의 과거에 관해서 설명하는 하나의 정신형식이다"라고 어려운 말을 썼다. 아따, 역사 그 자체에 대한 해석도 참 가지가지고 어렵다.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역사는 해석'이라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로써의 역사는 없다. 가치가 진공상태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럼 역사는 어떻게 해석될까? 우선 역사는 텍스트(Text)를 통해 해석된다. 텍스트란 ‘해석되기 이전의 원천자료’를 말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텍스트는 기록이나 증언, 그리고 몇 년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규명된 일들이다. 그런데 그 텍스트는 컨텍스트(Context)에 따라 해석된다. 컨텍스트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상황’이나 ‘맥락’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예수의 삶을 각각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썼기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컨텍스트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바로 '내가 지금 살아가는 자리'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했다고 하자. 작사가가 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나 싶을 정도로 세상 모든 이별노래가 다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극복하기 어려운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성경 어디를 펴 봐도 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가고 삶이 편안해지면 그때의 그 말씀을 다시 읽어도 그냥 무덤덤하게 느껴진다.


역사도 그렇다. 어떤 사건이 내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한국교회가 한참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을 때라면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한국교회가 개똥밭을 뒹구는 모습이 ‘왕성’할 때는 역사를 통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고, 잘못이 무엇인지 바라봐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찬란한 한국교회의, 흰 역사가 아니라 검은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인 것이다.


1주차 때 한국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2주차 때 한국교회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배우다보니 어느덧 4주 과정으로 짜여진 ‘찬란한 한국교회의 검은 역사’도 절반의 시간이 지났다. 강사님은 집에 많이 남아있다면서, 강의를 들으러 온 분들에게 자신의 논문을 손수 나눠주기도 했다. 딱딱해서 냄비받침으로 쓰기에 좋겠다고 하니 본인의 친구 중에 재떨이로 쓰는 ‘용자’가 있단다. 참여하신 분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이야기처럼 술술 풀어줘서 재밌다고 하신다. 그저 고마울 뿐. 강의가 끝난 후 나누는 찐한 ‘코이노니아’ 시간도 참 좋다.


방방곡곡의 동네교회청년 여러분, 어떠신가?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 3주차 때는 독재세력과의 야합과 빨갱이 논쟁에 대해, 마지막 4주차 때는 그 엄혹했던 시절의 기독청년운동을 통해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볼 심산이다. 강사님의 말마따나 지금부터가 우리가 살아가는 ‘본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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